내 영혼의 비타민, 가평에서의 하루!등록일 : 2010-11-15작성자 : 박가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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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이 두 글자에 가슴이 설레지 않는다면, 당신의 영혼은 지금 잠들어 있는 것일지 모른다.

사람들은 자주 여행을 떠난다. 산으로, 바다로, 들로, 강으로. 국내로, 해외로, 도시로 혹은 오지로. 

그런데 생각해 본 적 있는가? 없는 시간을 쪼개어, 많은 돈을 써가면서, 때로는 떠나지 않으니만 못한

체력손실까지 감수해가면서, 우리는 왜 그리 필사적으로 떠나는 것일까?

 아마도,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행만큼 청량한, 영혼의 비타민은 없음을.

잠시라도 일상을 떠나 여행자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가슴을 열어 세상과 소통하는,

여행이 주는 그 자유로움을 말이다.



 일 때문에 고향을 떠나 서울에 자리를 잡은지도 어느 덧 13년이 훌쩍 흘렀다.

서울에서 아무리 오래 살아도, 그 어떤 화려한 문화적 경험을 해도, 

맑은 공기와 탁 트인 푸른 하늘에 대한 갈증은 채워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가는 데만 네시간 반이 걸리는 고향에 자주 가거나,

주말마다 강원도로 떠나기는 힘든 노릇. 그런 내게 구세주처럼 나타난 곳이 바로, 가평이었다. 



 5년 전, 장기 공연이 끝난 우리 극단 사람들은, 가평으로 여행을 떠났다.

서울에서 불과 2시간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그렇게 맑고 깨끗한 자연을 간직한 곳이 있다는 사실은,

자연에 목마르던 내게는 엄청난 발견이었다.

1박 2일의 짧은 여행이었지만 우리 모두는 장기공연의 피로를 말끔히 씻고 활력을 되찾아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후, 나는 틈만 나면 가평으로 달려갔다.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이 열릴 때는 친구의 10년 묵은 봉고차(?)를 타고 가서 세계 각지에서 온 뮤지션들의 음악을 즐겼고,

남자친구가 생겼을 때는 아침고요수목원에서 가서 영화처럼 예쁜 추억을 만들었다.

남이섬 여행은 일에 지친 내게 동심을 일깨워 주었고,  

꽃무지풀무지 식물원의 품위 있는 소박함은 잊고 지내던 소소한 행복을 일깨워 주었다.





 

 그리고 2010년 11월. 나는 어느새 내년이면 30대 중반.

좌충우돌 수다스럽던 친구들과도 멀어지고, 연애도 조심스러워지는 나이.

열정만으로 해오던 일에도 회의가 생기기 시작했고, 미처 하지 못한 단풍구경도 너무나 아쉬웠다.

그래서 나는 떠났다. 나의 보물, 나의 쉼터, 내 영혼의 비타민, 가평으로!

 이번엔 친구들도 친지들도 연인과도 아닌, 나 혼자 떠난 여행이었다.

목적지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가평의 청정명산 중 하나인 호명산, 그리고 그 곳에 자리한 호명호수였다.

 

 혼자 떠나는 여행의 장점은 100% 자유롭다는 것이다.

약속시간에 쫓겨 헐레벌떡 달려갈 필요도, 분위기를 맞추느라 억지웃음을 짓거나 쉴 새 없이 떠들 필요도 없다는 것. 

느즈막히 늦잠을 자고 일어난 나는 여유롭게  빨래까지 하고, 카메라 하나만 달랑 챙겨 가평으로 떠났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하지만, 아무 문제가 없었다.

상봉 터미널에 가면, 언제라도 가평으로 가는 빨간색 버스를 서울시 교통카드를 찍고 탈 수가 있으니까.



 버스에서 느긋하게 신문을 보다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 새 눈 앞엔 탁 트인 북한강의 전경이 펼져져 있다.

아! 언제 보아도 가슴이 시원해지는 북한강의 이 상쾌한 전경! 

그새 고향처럼 정겨워진 청평 터미널에 내려, 호명호수로 떠나는 버스로 갈아 탔다.

 "기사님, 이 버스 호명호수 가는 거 맞죠? 호명호수를 보고 또 가까운데 갈만한 곳이 있을까요?"

 이 질문 때문이었다. 그 기사님이 그렇게나 친절하신 분임을 알게 된 것은.

 호명호수는 청평터미널에서 무척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리고 프랑스마을은 호명호수와 가까웠다.

가평엔 아직도 이렇게나 가보고 싶은 곳이 많다!)

꼬불꼬불한 산길을, 친절한 기사님의 설명을 들으며 편하게 올라갔다.

 



 

 마치 백두산 천지를 연상케하는 호명호수를 품은 호명산은,

예전에 호랑이가 많이 살아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호명산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해설사 분께서 알려주셨다.

과연, 호수를 감싸고 있는 산세를 보니,

울창한 산들이 끝없이 어깨를 맞대고 하늘에 닿을듯한 위용으로 뾰족하게 서 있었다.

인적이 드문 시절엔 호랑이가 수십 마리도 넘게 살았을 법 했다. 

아래로부터 차가운 칼바람이 불어왔지만 시야가 얼마나 푸르른지 자리를 떠나기가 싫을 정도였다.

그 산들과, 투명한 가을 하늘과,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는 호수를 보고 있노라니, 

일상의 자잘한 걱정거리가 머릿속에서 사라지며 절로 가슴이 탁 트였다.

웅장한 자연 앞에 서니 애쓰지 않아도 절로 호연지기가 길러지는 것만 같았다. 



 기사님은 해가 짧아졌으니 호수만 보고 내려가서 프랑스 마을을 둘러보라고 하셨지만,

나는 혼자 온 여행이고 하니 그냥 천천히 자연을 즐기며 쉬다 가고 싶었다.

기사님과 같은 버스를 타고 온 일행이 모두 떠나고, 나는 호수 주변을 한바퀴 빙 돌았다.  

 



 

 호명호수는 낙차에 의한 수력발전을 위해 만들어진 인공호수였다.

걷다 보니 그 수력발전 시설을 만들다 더러는 손목이 잘리고, 더러는 목숨을 잃은 분들을 위한 위령탑이 눈에 띄었다.

그냥 스위치만 올리면 전기를 사용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이렇게 여행을 더나보면 새삼 깨닫게 된다.

내가 누리는 그 어떤 사소한 편리함도, 다른 이들의 희생과 헌신없이 이뤄진 것은 없음을.

그렇게 우리는, 서로 돕고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임을.  

 

 호수를 둘러싼 야트막한 산에 올라가자  눈 주위가 까맣고 배가 노란 예쁜 산새 한 마리가 소나무 위의 벌레라도 잡는지 소나무 둥치를 콕콕 쪼며 지저귀었다. 

그 모습이 신기하고 귀하게 느껴졌다. 

요즘 아이들이 이기적이고 심약한 것은, 자연을 떠나 영어나 수학 학원만 바쁘게 쫓아다니기 때문은 아닐까?

혹여 내가 인연을 만나 엄마가 될 기회가 온다면, 나는 내 아이와 꼭 다시 이 곳에 오고 싶단 생각을 했다. 

굳이 가르치지 않아도, 이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 아이는 알 것이다.

어쩌면 나보다 더 크게, 깊이 느낄 것이다.

자연은, 그 안에 안겨있는 것만으로 인간을 성장시키는 법이니까.

그것이,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라면 더욱이.

 



 



        

 상쾌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차를 타고 올라왔던 산길을 걸어 내려갔다.

한 시간 후에 다시 올라오신 기사님께서 버스를 타라고 권해주셨지만,

이렇게 맑은 공기와 아름다운 경치를 그냥 지나치다니, 안될 말이었다. 

 

 바람은 차갑지만, 가을은 아직 가평의 깊은 산속에 머물러 있었다. 

손을 내밀면 불타올라 푸른 하늘로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붉은 단풍나무 숲.

이마를 맞대고 아치를 이룬 무지갯빛 단풍나무 터널이 감탄을 자아냈다.

떠나지 않았다면 이렇게 아름다운 가을을 미처 만나지 못하고 보냈으리.

나는 눈으로 그 찬란한 색의 향연을 즐기며 마음으로 나의 발길을 축복했다. 

 





 어쩌면, 호명산은 이끼 낀 콘크리트 돌덩이 하나까지도 이다지도 예쁠 수가 있을까!

연신 셔터를 눌러대느라 느린 발걸음이 더 더뎌지고 있었다. 

게으른 발걸음을 따라 천천히, 주홍빛 해가 기울고 있었다.

아, 그리고……!





 

  나는 생애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황금빛 보드라운 털을 가진 고양이 수만 마리가,

등에 난 황금빛 털을 치켜 세우고 몸을 맞대고 있는 것 같은 아름다운 숲을……!

그 털을 얻어다 옷을 해입으면 나도 반짝 반짝 온 몸이 아름답게 빛날 것만 같았다.

그 털이 깔린 길도 온통 황금빛이었다. 

나는 마치 여신이 된 듯한 기분으로, 호명산이 제공하는 그 놀라운 호사를 마음껏 누리며 길을 내려왔다.

(길을 내려와 주민분 설명으로 알게 된 것이지만, 그 황금빛 털의 정체는 낙엽송의 잎이었다. 

두 발로 걸어 여행하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신비를, 낙엽송은 숲을 이루어 온 몸으로 내게 말해주었다.)     



 한 시간이 넘게 산길을 걸어 내려오자니, 어느 새 해는 지고 기분 좋은 피로와 허기가 함께 찾아왔다.

버스기사님만큼 친절한 안내소 직원분께서 추천해주신 식당에 들러,

가평의 특산물 잣으로 만든 묵사발과 더덕구이를 주문했다.

홀로 찾아온 뜨내기 손님에게도 식당 직원분은 상냥하셨다.

난로를 쬐며 온갖 한약재를 넣은 차를 마시자니, 차가워진 몸이 금방 따스해졌다. 

나는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며 즐거이 펜션을 겸한 음식점 내부를 구경했다. 



  



 타다 남은 초와 벽에 가득한 사람들의 흔적.

고독했지만, 충분히 행복했다.



곧 음식이 나왔다. 두유처럼 곱게 간 잣이 가득한 잣묵사발.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으니 그 부드러움과 고소함에 마음까지 치유받는 느낌이었다.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적당히 운동까지 하고, 기분좋게 하는 식사가 맛이 없을 리가 있나. 

이어서 나온 더덕구이 백반도 하나 남김없이 싹싹 비웠다.



 

   

 식사를 끝내고 나오니, 친절한 기사님은 마침 버스를 몰고 호명호수로 올라가는 길이셨다.

십여분 후에 내려올 테니 길가의 포장마차에 들어가 추위를 피하라고 일러주셨다. 

하지만 그 곳도 식사를 하는 곳이었다.

해가 진 산속은 손이 시려울만큼 추웠지만, 다른 곳에서 밥을 먹는 나는

괜히 미안한 마음에 선뜻 문을 열지 못하고 망설였다. 

하지만 오래 망설이기엔 바람이 너무 차가웠다. 나는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다.

평일이라 손님은 없었다. 주인 아주머니와 아들 두분이 식사를 하는 중이셨다.

버스를 기다리다 추워서 들어왔다고 하자,

선뜻 뜨거운 차를 내어주시며 인근의 도자기 공방 안내까지 해주시는 것이었다. 

 

 그렇게, 가평은 자연이나 사람이나 낯선 이를 내치지 않고 따뜻하게 품어주었다.

버스에 올라, 서울살이 13년에 어느새 팍팍해진  내 마음을 돌아보았다.

나도, 가평의 자연과 사람을 닮고 싶단 생각을 했다.



 가평 터미널에서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를 탔다.

 " 아~ 잘 놀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나도 모르게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래, 진심으로 정말 너무나 좋은 하루였다.

좋은 사람들과 우르르, 혹은 사랑하는 사람과 단 둘이 이곳 저곳 구경 하는 것도 즐겁지만,

혼자 이렇게 호젓이 자박자박 걸어서 하는 여행 또한 얼마나 가치 있는가.

눈으로 어두워진 북한강을 더듬는 사이, 소르륵 잠이 쏟아졌다.

그리고 한잠 달게 자고 나니, 어느 새 서울이었다. 



 이렇게 가평에서의 하루가 또 저물었다.

갈 때마다, 계절마다, 장소마다 너무나 다양한 표정의 아름다운 가평. 

가까이 이렇게 아름다운 여행지가 있다는 것은, 삭막한 콘크리트 숲에 사는 도시인들에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산은 산대로 물은 물대로 너무나 청정한 에코토피아 가평!

내 영혼의 비타민인 그 곳을, 나는 진심으로 축복한다.

 

가평의 푸른 기운으로 나는 또 한동안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 영혼이 지쳐갈 때쯤, 또 이 곳을 찾게 되겠지.



벌써 기대가 된다.

순백의 천국으로 나를 맞아줄, 가평의 겨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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