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정에 추증된 金佐明(김좌명)등록일 : 2010-07-13작성자 : 관리자

김좌명의 자는 일정(一正)이고 호는 귀계·귀천(歸溪·歸川)이며 본관은 청풍(淸風)으로 1616년(광해 8)11월 19일 잠곡(潛谷) 김육의 장남으로 가평군 외서면 청평리 잠곡동에서 태어났다.1633년(인조 1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644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서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였으나 취임치 않고 후에 博士·說書로 있다가 홍문관으로 옮겼다.그 후 병조좌랑이 되였을 때 다시 문과중시(文科重試)에 합격하여 수찬(修撰)이 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한 때 안변으로 귀양가는 형편에 놓였다가 1년만에 돌아오는 아픔도 겪었다.효종조에 이르러 다시 수찬이 되였다가 교리·이조좌랑·사복사정·대사헌·경기도관찰사·대사 간·대사성·도승지등 주요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현종조초 그는 공조참판으로 있였는데 아버지 김육이 생전에 호남지방에 실시토록 한 대동법의 시 행에 많은 애로점이 있는 것을 한탄하고 아버지의 유지를 펴기 위해 호남 관찰사로 임명해 줄것을 간청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대사헌·도승지를 거쳐 예조참판을 지냈고, 1662년(현종 3) 46세에 공 조와 예조의 판서를 지내다가 병조판서겸 수어사가 되어 병기·군량등의 책무를 성실히 수행하며 군사 훈련을 엄격히 실시하였다.1672년(현종 13) 3월 9일 56세로 영면하니 조정에서 영의정으로 추증하고 시호를 충숙(忠肅)이라 내렸다. 문장이 뛰어났고 글씨도 명필이였으며 저서는 귀계유고(歸溪遺稿)가 있고, 김장생·김식등의 비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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