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이항로의 문하로 들어가 배운고로 그 재질과 덕망이 뛰어나 조정으로부터 감역(監役)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오로지 성리학에 몰두하며 학문의 길로 들어섰다.1881년(고종 11) 62세의 나이로 영남에 내려가 이만손을 비롯한 유생 1만여명에게 척사위정(斥洋斥倭)운동을 벌렸는데 그 해 7월에 다시 초안해 올린 척양척왜(斥洋斥倭)의 상소로 말미암아 섬으로 유배 되였다가 대원군 이하응이 집권하자 풀려났다.
그는 이항로의 학통을 계승하여 당대의 뛰어난 학자들을 길러냈고, 학통고(學統考)등 수많은 저술을 지였다.1888년(고종 25) 70세로 영면하고 가평 미원서원(설악면 소재)에 배향되였다. 그가 가평땅 조종암 에 이르러 대통묘에 참배한 때는 1871년(고종 8) 10월 계해일(癸亥日)이였으니 그의 나이 53세때 였고, 57세 되던 해에는 구의사전(九義士傳)을 지였다.중암 김평묵은 1876년 봄에 가평읍 승안리 속청 자리터에 이르러 성재 유중교선생과 더불어 자양서 함(紫陽書含)를 지어 놓고 학동을 가르쳤으며 아예 가솔을 데리고 이주해 왔었다.승안리 용추계곡을 옥계구곡(玉溪九曲)이라 이름한것도 김평묵·유중교등이 이곳에 이사와서 살며 지은 이름이고, 이 계곡을 중국의 무이구곡과 비교한 이들도 이분들이다.
중암 김평묵선생이 가평군 설악면 신천리 속청 큰 골(大谷)에 이주한 해는1867년 3월 그의 나이 48 세때였다. 그는 이곳에 머물러 살면서 양구·홍천 등지에서 찾아와 배우는 학동들을 가르치며, 생존한 노모(장수 황씨)를 봉양함에 극진한 효성을 다하여 효행삼덕의 실천을 몸으로 보여주는 효성을 다했다.50세가 되던 5월 한포서사(漢浦書社)를 짓고 두개의 대(臺)를 세웠는데 하나는 관물대(觀物臺)였고 또 하나는 겸산대(兼山臺)였다.공부하는 학동이나 그를 찾아오는 많은 학자들의 휴식공간과 대화를 나누는 정자였다. 지금도 그 때 돌에 새겨 놓았던 관물대와 겸산이란 암각서가 남아있어 그때의 정황을 회상시켜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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