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3년(인조 11) 시강원 說書가 되였으나 인조 13년 부모의 상을 연이어 당하자 사직하고 여막을 지어 사친지효(思親之孝)의 예를 다했으며, 1641년 전적·감찰이 되고 다시 특평(特平)으로 승진하여 양사춘방(兩司春坊)에 드는 영광을 얻고, 正言·獻納·사간·장령·집의·필선·보덕등의 주요관직을 두루 거치고 병조정랑·직강·좌우통례·장락원·종부시·사복시 正을 지냈다.
1644년에는 필선(弼善)이 되고 이어 원주목사로 나가 백성을 돌보는데 선행을 가렸으므로 청백리라 이른다.1649년도 부터는 영남·호남지방의 장시관이 되였다가 1661년(현종 2) 62세에 판교가 되고 이어 통정대부로 승진하였다.
1668년 무신년에는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기뻐하지 않았으므로 모든 이들이 안타까이 여겼다고 한다.
그는 1670년 12월 향년 70세를 일기로 영면하여 가평군 북쪽에 부인 양주조씨와 함께 묻혀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 기록은 국조인물고에 있는 것이고 묘갈은 6·25 전란중 피해를 입 어 내용이 선명치 않다.현재의 북면 소법리 달맞이 봉에 묘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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