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기골이 준수하고, 총명하여 장차 훌륭한 인물이 되리라 청송하였고 상(相)을 보는 이 들은 그를 법왕아(法王兒)라 불렸다.13세가 되어서는 회암사에 들어가 광지선사에게 의지하여 출가하 고, 가지산총림에서 수행하였다.19세에는 만법귀일(萬法歸一)이라는 話頭에 참여하여 법을 설파했지만 대중들이 알아듣지 못했다고 한다.
그의 성품이 매우 활달하고, 목소리가 커서 한번 말을 하게되면 산울림 같았다. 이러한 그의 장엄한 기상을 시기한 승려들로부터 한 때 버림받기도 하였지만 그는 항상 태연해 하였다.26세에 화엄선과(華嚴禪科)에 합격하였고, 그는 이때부터 더욱 경전의 진리와 이치를 탐색하여 심 오한 지경에 이르는 연구에 진력하였다.
1330년(충숙왕 17) 봄 용문산 상원암에서 관세음보살에 예배 하고, 12가지의 큰 원(願)을 세워서 정성을 다하여 기도할 때 그는 눈에서 피가 나도록 온 힘을 다해 정진하였다. 그러한 뒤부터 더욱 영리하여 그의 기상이 마치 한자루의 칼날같이 우뚝했다고 한다.1333년 그는 감로사에 머물고 있었는데 가을무렵 분발하여 이르기를 "기질이 잔약하여서 큰 일을 이 룰 수 없을 바에는 차라리 고행을 하다가 죽어서 몸을 바꾸는 이만 못하겠다." 하며 승당(僧堂)에 좌정 하고 앉아 정진한지 7일째 되던 날 그는 혼수상태에 빠졌다. 그런데 어데선가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나타나서 한손에는 잔을 받치고, 또한손으로는 병을 기울여 백탕(白湯)을 권하므로 마셨더니 단맛이 감 돌고는 이내 깨달음이 있어 게송팔구(偈頌八句)를 지었다.一亦不得處 踏破家中石 回看沒破跡 看者亦己迹了了圓陀陀 玄玄光燦燦 佛祖與山河 無口悉呑却하나도 얻을 것이 없다 하여 집가운데 돌만 깨뜨렸네돌아보니 깨뜨린 자취없고 돌아본 그 자체도 적막하여라.부처와 山河까지도 모두 다 삼켜 버렸나니······.
1337년 37세되던 겨울 전단원에 머무르면서 무자화(無子話)에 참여하고, 이듬해 정월 초이레날 오 경(五更)에 드디어 대오(大悟)하여 오도송(悟道頌)을 지었으니 그 끝구절은 이러하다."打破牢關後 淸風吹太古" "뇌관을 타파하고나니 청풍이 태고에게 불어오누나"이해 3월 고향인 설악면 설곡리로 돌아와 몸소 소설암(小雪菴)을 짓고 부모님을 곁에 모시고 지극 한 효성을 다해가며 부처님께 발원하였으니 이는 불교와 효도에 대한 표상이 되었다.
그는 일찌기 千七百則을 보았는데 암두밀계(巖頭密啓)라는 대목에 이르러 그 뜻을 알수가 없었는데 한참만에 의문이 열리므로 이르기를 "巖頭雖善射 不覺露濕衣" "바위머리도 비록 잘 쓴다지만 이슬에 옷젖음을 깨닺지 못하였네" 라 하 였다.1339년(충숙왕 8) 봄 그는 부모님을 하직하고 소요산 백운암에 머물다가 삼각산 동쪽에 암자를 짓 고 태고사(太古寺)라 하였다. 1346년(충목왕 2) 46세에 중국에 들어가 연경(燕京)등지를 유람하고, 호 주(湖州)에 있는 하무산에 들어가 석옥공(石屋珙)선사를 만나보고 태고암가(太古菴歌)를 지어 바치니 석옥이 깊이 탄복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많은 불서와 선계를 공부하여 터득하니 석옥은 또한번 탄복하 고 그의 신표로서 가사 한벌을 주면서 "좌승(左僧)은 오늘에야 비로소 발을 뻗고 자겠다." 하였는데 석옥은 임제의 18대손이다.보름간이나 그곳에서 머물다가 헤어질 때 석옥은 주장(柱杖)을 주면서 "부디 잘다녀가라"는 말을 몇차례나 반복하였다. 그가 절하고 연도로 돌아오니 어느덧 그의 명성이 자자하여 가는곳마다 그의 설 법을 듣고자하는 이들로 인산 인해를 이루었다. 당시 천자가 이 사실을 전해 듣고 특별한 예우를 갖추 고 영령사(永寧寺)에 당(堂)을 열 것을 청하면서 금란가사와 심향불자(沈香佛子)를 하사하였고, 왕비와 황태자는 향폐(香幣)를 내렸으며, 왕공사녀(王公士女)들은 너도나도 예배에 참여하였다. 그는 이때에 반약경(般若經)을 설교하였다.
1348년(충목왕 4) 봄에 귀국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짓다 떠난 소설암을 완성하고, 몸소 능사도 지 으면서 4년간을 지내며 이곳에서 山中自樂歌를 지었다.
1352년(공민왕 1) 여름 공민왕이 대호군 손습 (孫襲)을 보내 국사(國師)로 모신다고 청했으나 응하지 아니하니 다시 사신을 보내 더욱 간절히 청하므 로 마지 못해 나아갔다.이에 왕이 이르기를 "감사하도다. 미원장(迷源莊)의 아전이 스님의 훌륭함을 알아보고 받들어 모셨 구나."하면서 그의 고향 迷源莊(설악면)을 미원현(迷源縣)으로 승격시켜 주었다.이후 잠시 경룡사에 머물렸으나 한여름이 지난뒤 국가에 변란이 있음을 예견하고 사퇴하여 소설산 으로 돌아왔다.
그런지 얼마 않되어 조일신의 난이 일어났다.1356년(공민왕 5) 문하평리로 있던 한가귀를 보내 다시 나오도록 청했으나 사양하자 판전교 이정 을 보내 또 청하므로 사양치 못하고 나가니 공민왕이 봉은사에서 설법하기를 요청했는데 이 때 선교가 다 모이고 왕이 직접 임석하 여만유가사와 수정염주 등 입고 쓸 것을 많이 바쳤으며 그는 이 때 종지 (宗旨)를 천양하였다.임금이 金字로 대장경을 만들기를 원하니 그는 보시로 받은 금을 모두 대장경 제작비용으로 쓰고 불사(佛事)가 끝난 뒤 산으로 들어가기를 글로서 아뢰니 공민왕은 "과인이 스님의 도를 일찍부터 알고 사모해 왔소이다. 이제 과인의 소망을 꺽지 마소서. 스님이 머물러 있지 않으면 도리에 어긋남니다." 하고 왕사(王師)로 책봉하고, 부(府)를 세워 원융부(圓融府) 라 하였으며 요속과 장관을 두고 정삼품을 내리니 그를 존중하는 예우가 비길 데 없었다.이날 오래도록 가물던 끝에 비가 내리니 임금도 즐거워 하며 왕사우(王師雨)라 표현했으며 전국 도 처에서 이를 치하하는 글을 올렸다.
이듬해에 사직을 요청했으나 임금의 윤허가 없으므로 그는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는데 임금도 그 뜻을 꺽을 수 없음을 알고 법복과 인장을 모두 챙기어 머물고 있던 거처 로 보내주었다. 1362년(공민왕 11) 가을에는 양산사에 머물 것을 청하고, 이듬해에는 가지사에 머물 다가 1367년 10월에 사직하여 인장을 봉환하고 마음대로 지내면서 양진케 하여 줄것을 간청하여 왕이 들어 주었는데 이는 모두가 신돈이 용사(用事)한 때문이었다.이에 앞에 그는 왕에게 글을 올려 신돈을 논하기를"나라가 잘 다스려 질때는 진승(眞僧)이 뜻을 얻게 되고, 나라가 위태로우면 사승(邪僧)이 때를 만 나게 되는 것이니 상께서는 잘 살피시어 멀리 하시면 종사에 다행함을 얻을까 하옵니다." 하였으니 그 의 충성심은 물론이요 국사를 영위함에 있어 살핌이 없어야 한다는 정치철학의 솔직담백한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이듬해 봄에는 전주에 있는 보광사에 머물렀는데 이는 당시 왕위에 군림하려 했던 신돈의 음모에 기인한 것이었으며 그는 끝내 신돈의 계략에 속은 임금으로부터 속리산 속리사에 금고토록 하라는 어처 구니 없는 명을 받기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1369년 3월 공민왕은 자신이 신돈의 술책에 속은 것을 후 회하고 미원땅 소설산으로 돌아가게 하였다.1371년 신돈은 국사를 능락한 대죄로 참수되었으며, 공민왕은 흐트러진 국정을 바로잡기 위하여 예를 다하여 국사(國師)로 추대하고 법호를 내렸고, 이때 익화현이던 양근땅을 익화군(양근군)으로 승 격시켰는데 이는 국사가 태어난 고향 덕분이었다.
그는 국사가 되어서도 국사가 거주할 영원사에 머물 지 않고, 소설암에 내려와 멀리서 사사(寺事)를 관장한것이 7년간이나 넘었다. 1381년(우왕 7) 겨울 양산사로 옮겼는데 우왕은 선군의 고귀한 뜻을 받들어다시 국사로 책봉하였다.이듬해 여름 그는 "돌아겠노라"는 계송을 하다가 소설산으로 돌아오니 모든 이들이 그 이유를 알지 못하다가 연못에 물이 마르고 8그루의 소나무 가운데서 4그루가 말라 버린 것을 보고는 더욱 흠모하였 다고 한다.
그 해 12월 17일 미질(微疾)이 있더니 그 3일에는 문인들을 불러놓고 이르기를 "내일 유시(酉時)에 내가 가게 될 것이다. 군수를 청하여 봉인함이 옳을 것이다." 하면서 사세상(辭世狀) 몇통을 불러 적었? 입었으며 드디어 유시경이 되자 단정히 앉아 임종게를 외웠다.人生明若水泡空 八十餘年春夢中臨終始令放皮臺 一輪紅曰下酉峰인생의 목숨 물거품처럼 허무한데 일평생 산것이 모두가 꿈이로다이제사 가죽부대 이렇게 버리노니 한바퀴 붉은 해 서쪽으로 잠겨가네그는 계송이 끝나자 목소리가 점점 작아 지면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82세이고 법람은 69세였 다.
보우의 부음(訃音)을 들은 왕은 몹시 슬퍼하며 다비식에 쓸 향을 내렸으며 다비가 있던 그날 밤 밝 은 빛이 하늘까지 뻗치고, 사리도 무수히 많아 사리 일백과를 왕궁에 올리니 왕은 더욱 공경하고 존중 하여 유사에게 명하여 시호를 원증(圓證)이라 하고 사리탑을 중홍사 동쪽 봉우리에 세우고 탑호를 보월 승공(寶月昇空)이라 하도록 명하였다.문인들이 석종을 만들어 사리를 간직한 곳이 양산사·사나사· 청송사·대고암·소설암이다. 고려 우왕 11년인 1385년 왕명에 의하아 원증국사탑비를 목은 이색이 지 었는데 그 명(銘)에 이런 글이 적혀 있다.국사의 마음은 바다같이 넓고하늘이 강림하는 것 같았도다.국사의 자취는浮杯와 飛錫같이 신통하였도다.지우를 받으니 왕자의 스승이어라소설산에서 몸소 밭을 가니隱現이 때에 맞았도다때로는 鷲城에서도 刑名을 농락하였도다.그러나 구름이 하늘을 가림과 같이국사의 명성에는 손상이 없었도다.
달이 崑崙에 젖어도 남은 빛 있고사리는 영통하니 王門에 빛나도다.오직 삼각산만 푸르러 구름에 비꼈도다.탑을 그 아래 세우니나라와 더불어 길이 평안하도다.국사의 높은 뜻 동방에퍼졌으니 신(臣)은 절하고銘을 지으면서 무궁토록 전해지기를 믿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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