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평군에 봉해진 이형손 등록일 : 2010-07-13작성자 : 관리자

이형손(李亨孫)의 자는 창백(昌伯)이고, 본관은 가평(加平)이며, 1418년(태종 18) 가평이씨의 중시조인 이다림의 차남으로 태어났다.그는 태어날때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용모가 출중했으며 또한 활쏘기를 즐겨 자주 익힘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20세가 되어 도시(都試)에 합격하고 내금위에 들어가 있으면서 세번이나 도시에 장원하였으며, 1447년(세종 29) 길주판관이 되어 고을 백성을 잘 다스린 공로로 통정대부가 되고 군기사 부정에 승진하였다.

1457년 가을에는 함길도 채방사로 나아가 매사를 정당하게 처리하고 돌아온후 세조대왕으로부터 가 상(嘉賞)을 받고, 이어 절충장군이 되었으며 남포·옥구의 병마사와 함길도 도진무사·의주목사를 역임 하면서 높은 인격과 덕망으로 큰 치적을 쌓았다.

1467년 여름에 박중선과 같이 평안도 군사를 거느리고 역적 이시애의 난을 토벌하고 돌아와 적개공 신 이등(二等)에 올랐다.그해 가을 다시 가선대부 가평군으로 봉해져 전라도 절도부사겸전주부윤이 되었으나 이듬해 부친상을 당하여 사직하고 돌아와 노모봉양에 힘쓰니 성종대왕이 이를 가상히 여기어 특별히 모친이 살고 었는 공주의 목사로 발령하여 봉양지효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후에 청주목사 로 나갔다가 홍주목사로 옮기고 다시 병조참판이 되었다.

1492년 우임위장으로 오위도총부부총관, 내금위장, 훈련원 도정을 겸하였다. 이어 봉조하(奉朝賀)가 되었으나 미질(微疾)이 일어 1496년(연산군 2) 3월 19일 향년 79세에 별세하였으며, 정헌대부 병조판서 에 증직되고 시호를 평호라 하였다.

그는 일생동안 여섯 임금을 섬기며 치적을 쌓았고, 가문과 집안을 화목으로 이끌었으며 효경과 실 천 언행이 일치하여 수신제가에 항상 법도가 있었고, 충성으로 국사의 소임을 다하고 흉적을 토벌하는 등 그의 빛나는 공적이 뛰어났다는 기록이 순천후인 김철희가 지은 신도비명에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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