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가 되어 도시(都試)에 합격하고 내금위에 들어가 있으면서 세번이나 도시에 장원하였으며, 1447년(세종 29) 길주판관이 되어 고을 백성을 잘 다스린 공로로 통정대부가 되고 군기사 부정에 승진하였다.
1457년 가을에는 함길도 채방사로 나아가 매사를 정당하게 처리하고 돌아온후 세조대왕으로부터 가 상(嘉賞)을 받고, 이어 절충장군이 되었으며 남포·옥구의 병마사와 함길도 도진무사·의주목사를 역임 하면서 높은 인격과 덕망으로 큰 치적을 쌓았다.
1467년 여름에 박중선과 같이 평안도 군사를 거느리고 역적 이시애의 난을 토벌하고 돌아와 적개공 신 이등(二等)에 올랐다.그해 가을 다시 가선대부 가평군으로 봉해져 전라도 절도부사겸전주부윤이 되었으나 이듬해 부친상을 당하여 사직하고 돌아와 노모봉양에 힘쓰니 성종대왕이 이를 가상히 여기어 특별히 모친이 살고 었는 공주의 목사로 발령하여 봉양지효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후에 청주목사 로 나갔다가 홍주목사로 옮기고 다시 병조참판이 되었다.
1492년 우임위장으로 오위도총부부총관, 내금위장, 훈련원 도정을 겸하였다. 이어 봉조하(奉朝賀)가 되었으나 미질(微疾)이 일어 1496년(연산군 2) 3월 19일 향년 79세에 별세하였으며, 정헌대부 병조판서 에 증직되고 시호를 평호라 하였다.
그는 일생동안 여섯 임금을 섬기며 치적을 쌓았고, 가문과 집안을 화목으로 이끌었으며 효경과 실 천 언행이 일치하여 수신제가에 항상 법도가 있었고, 충성으로 국사의 소임을 다하고 흉적을 토벌하는 등 그의 빛나는 공적이 뛰어났다는 기록이 순천후인 김철희가 지은 신도비명에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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