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젊어서부터 기품이 단정하고 범인의 행색을 뛰어넘어 부친이던 양주목사 이공달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그러나 불행히 부모를 일찍 여위어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실정에 놓여 마치지 못하고 1532년(중종 27) 무과에 입시하여 호방을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여 즉시 선전관에 임명되었다.
이때 중종대왕이 친히 교외에서 군사들이 하는 열병식을 보는 자리에서 군령의 지휘권한을 맡게 되어 그 자리에 임하여 병사들의 진퇴와 임기응변의 방법에 통달했던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여 임금으로부터 직접 찬사를 듣는 영광을 안았다.중종대왕의 특명으로 도총도사가 되고 그후 문관으로 특채되어 판관에 임명되었으며 내직으로는 사복시·제용감·군자감에서 재적하고 외직으로 정주·의주수령을 역임하고 다시 이산군수로 있었다.
1545년 상의원 첨정이 되어 중종산릉의 감동으로 뽑히고 그해 겨울 창원부사로 나갔다. 이어 절충 장군으로 승진하여 가덕진의 첨지 절제사가 되고 이듬해 여름에는 경상우도 수군장이 되었다.
그러나 한때 권력의 비유를 건드려 삭직되었다가 다시 황주목사·양주목사등을 역임하고 1560년 평산군수, 1563년 봄 영남우도병마절도사, 호남우도 수군절도사, 길주목사를 지냈다. 이때 그의 나이 70이 가까 왔으나 외모와 기력은 쉬하지 않았지만 늙음을 이유로 부임하지는 않았다.
1575년(선조 8) 향년 72세로 영면하니 조정에서는 담당관을 정해 조문하고 치제를 하명하여 예의 에 슬픔과 명예가 겸비하였다.그는 평소 매사에 행동이 뚜렷하고 의젓하여 항상 위엄이 있었다. 평소에는 말이 적고 어울리기를 즐기지 않았으나 어린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고 한다.
후에 병조참판으로 증직되었고, 묘는 가평군 외서면 삼회리 속청 야미골에 있으며 현 사기막부락에 도 승지를 지낸 박승임이 지은 신도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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