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9년(선조 12)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된 후 학문에 전념하고 있었는데 1583년(선조 16) 부친 이제신이 북병사가 되어 북쪽 변방으로 나갔는데 그는 이때 포의(布衣)로서 상소하기를 이제 전선으로 나아가 아버지와 함께 나라를 지키다 죽기를 원하니 선조대왕이 장하게 생각하고 전지(傳旨)를 내려 보 냈는데 이미 이와같은 사실을 전해들은 백성들이 성밖에서 인산인해를 이루며 그의 장도를 빌었다고 한 다.이때 부친은 적소(謫所)에 들어 병환이 위독하게 되었는데 그는 곁에서 향을 피우며 회생을 빌었고, 대편(大便)의 맛을 보아 길흉을 징험하고 때로는 손가락을 깨어 피를 약에 섞어 드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끝내 부친이 세상을 뜨자 그는 삼년을 하루같이 묘를 지키며 하루에 죽 한그릇씩만 먹으며 불효의 아픔을 다했다고 한다.
1590년(선조 23)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으로 들어가 일하다 주박(主薄)로 승진하고 감찰과 호조좌 랑을 거쳐 통진현감에 임명되었다.그 후 예조정랑·장락원 첨정·영해부사·태상사 첨정 그리고 국 자·사성·사헌부·장령·군자감·사옹원·선공감등의 정을 거치고 종성·나주·광주·강계등의 부사와 목사로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는 않았다.
이후 승문원 판교·사복사 정이 되었다가 1605년 통정대부로 승진되어 길주부사가 되고 다시 영흥 대도호부사로 옮겼다.이듬해 벼슬이 바뀌어 서울로 돌아와 하지사(賀知使)가 되어 중국 심양에 갔다 가 돌아오는 길에 뜻밖의 병을 얻어 영평땅 봉산관에서 세상을 뜨니 그의 나이 49세였다.
묘는 가평군 청평면 삼회리 속청 잣나무골에 있고, 후에 효자로 정려(旌閭)되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지범 이수준은 평소 낙천적인 성격으로 식견이 막힘이 없었으며 키가 장대하고 골격이 뛰어나 풍재 가 아름답고 의젓하였으며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볼정도의 형안을 갖었다.
우계문하에서 동문수학하며 30여년간을 친구이자 교우로 지내오던 월사 이정구는 그가 죽은 후 비명을 지었는데 그 내용이 너무도 애절하다. 비문에는 이런 글이 실려 있다."중국으로 사신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도중에 세상을 뜨니 그의 친구는 물론백성들이 달려와서 울면 서 통곡했으며 지나는 골골마다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조성에서는 모든 관직비속들까지 달려와서 조문하며 애도를 표하였다.···또··· 銘에는슬프다 우리 台徵長者의 풍모이며재상포부 지녔는데가난한 팔자인가 그래도 남 도우며 돌을 차도 자기 탓이고가풍 또한 그러하니 그 뜻 뉘 꺾으리······.그대의 높은 행실 孝友가 근원일세학문이 깊지만은이제 들을 길이 없네내가 이 銘 쓰지마는그대 德行 못다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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