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문동 七十二人 이필행 등록일 : 2010-07-13작성자 : 관리자

이필행(李必行)의 자는 이원(而遠)이고 호는 천미(天微)이며 본관은 광주(廣州)이다.그는 1589년(선조 22) 7월 28일 이사수의 아들로 태어났다.어려서부터 영특한 기질이 있어 부모의 총애를 받았고 특히 영의정을 지낸 동고 이준경이 그의 증 조부였으므로 그는 증조부로부터 학문의 기본으로 삼았던 소학을 배우고, 이때부터 동문수학하던 윤선 도와 절친한 교우관계에 있었는데 훗날 윤선도는 한국시가문학의 대표적 존재이기도 하며, 이필행의 묘 갈(비석)도 윤선도가 썼는데 가장 절친한 사이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그를 아는 모든 이들로부터 청송을 들었다.1623년(인조 1) 36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 갔는데 그의 나이가 많았던 것은 당시 광해 군의 폭악정치에 환멸을 느끼던 터라 과거를 포기한 상태로 학문에만 전념한 때문이었다.

1626년 정자가 되고 이어 박사·성균관 전자·사헌부 감찰·예조·병조·형조의 좌랑을 거치다가 1632년 정월 경성판관이 되고, 그 이듬해에는 보성군수로 나갔으나 병으로 인해 사직했고 다시 경상도 사·대동찰방·형조정랑·丙子年 6월 통예원 상례로 제수되었지만 병이 심해 관직을 모두 버리고 경기 도 여주로 내려가 두문불출하며 독서와 종약(種藥)으로 벗을 삼으며 자청 천미거사라 불렸다.

그러나 병자호란으로 인해 인조대왕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고, 여주지방마저 적의 피해를 입자 그 는 지평을 거쳐 춘천으로 피신했는데 정월추위가 흑독하여 눈덮인 산속에서 5일간이나 있는동안 허기에 지치고 동사될 운명에 처하였을 때 홀연히 설상인이 나와 길을 가르쳐 주므로 10여리 정도를 찾아가니 과연 그곳에 촌가가 있어 목숨을 건졌다는 기록도 보인다.

후에 사헌부 장령으로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사헌부 사간·승문원 판교·사복시 정·홍문관 응교로 여러번 불렀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그는 다시 여주로 내려가 살았으나 생활이 어려워 때로는 죽도 못끓일 정도였고, 소나무 껍질 등을 벗겨다 먹으면서도 마음을 편안히 하고 항상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1645년(인조 23) 2월 3일 향년 57세에 세상을 떴는데 그는 임종할 무렵 자제들에게 이르기를 병자 란 전에 관직을 맡았던 통례원 상례를 관이나 명정에 쓰고 숭정연호를 쓰라는 유연을 남기기도 하였다.

숙종조에 이르러 조정의 각부대신들이 상소를 올려 그는 이조참판으로 증직되고 병자록과 존주록에 수록되었다.묘는 설악면 선촌리 울업 무덤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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