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이미 용모가 출중하였고, 10여세에 한편의 작문을 지으면 선배들이 보고 모두 경탄해 마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22세되던 1616년에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정자와 전적을 거치고, 공조좌랑에 이르렸으나 앞 서 일어난 폐모론에 가담치 않았다하여 파면되었다.
그러나 인조반정후 경연시독관이 되고, 이괄의 난 이 일어나자 왕을 공주로 호종하여 8도에 보내는 교서를 짓기도 하였다.
그후 여러 조(曹)의 참의와 대사간·부제학을 지내고, 1639년(인조 17년)에 병조참의 도승지를 거쳐, 1641년 한성부우윤이 되
고, 다시 대사헌·도승지겸 대제학·이조판서등을 역임하였다.
1643년 이경여·신익성등과 함께 척화파라 하여 심양에 잡혀가 억류되었다가 풀려났으나 이듬해 세자 이사(貳師)가 되어 세자를 모시려 중국 심양으로 갔었고, 1645년에 명나라와 밀통하는 咎文(자문) 을 썼다하여 다시 청나라에 잡혀갔다가 뒤에 풀려나와 예조판서가 되었다.
그는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시와 글씨에 뛰어났다.
일찌기 백사 이항복도 어린 백주를 보고 크게 청찬한 바 있으며, 매사에 편벽됨이 없었고, 사리에 통달하여 가정에서나 친족
간 또는 노소간에 애모의 정이 떠나지 않았다.
인조 23년인 서기 1645년에 향년 51세에 영면하였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묘는 상면 태봉리 원사의 묘 위에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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