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서를 통달한 이명한 등록일 : 2010-07-13작성자 : 관리자

이명한(李明漢)의 자는 천장(天章)이고, 호는 백연(白淵)이며, 본관은 연안으로 선조 29년인 서기 1595년에 월사 이정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이미 용모가 출중하였고, 10여세에 한편의 작문을 지으면 선배들이 보고 모두 경탄해 마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22세되던 1616년에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정자와 전적을 거치고, 공조좌랑에 이르렸으나 앞 서 일어난 폐모론에 가담치 않았다하여 파면되었다.
그러나 인조반정후 경연시독관이 되고, 이괄의 난 이 일어나자 왕을 공주로 호종하여 8도에 보내는 교서를 짓기도 하였다.
그후 여러 조(曹)의 참의와 대사간·부제학을 지내고, 1639년(인조 17년)에 병조참의 도승지를 거쳐, 1641년 한성부우윤이 되
고, 다시 대사헌·도승지겸 대제학·이조판서등을 역임하였다.
1643년 이경여·신익성등과 함께 척화파라 하여 심양에 잡혀가 억류되었다가 풀려났으나 이듬해 세자 이사(貳師)가 되어 세자를 모시려 중국 심양으로 갔었고, 1645년에 명나라와 밀통하는 咎文(자문) 을 썼다하여 다시 청나라에 잡혀갔다가 뒤에 풀려나와 예조판서가 되었다.
그는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시와 글씨에 뛰어났다.
일찌기 백사 이항복도 어린 백주를 보고 크게 청찬한 바 있으며, 매사에 편벽됨이 없었고, 사리에 통달하여 가정에서나 친족
간 또는 노소간에 애모의 정이 떠나지 않았다.
인조 23년인 서기 1645년에 향년 51세에 영면하였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묘는 상면 태봉리 원사의 묘 위에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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