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에 진사에 합격하였는데 고관들이 따로 불러 처음 시험본 초방(草榜)을 쓰게하니 그는 일필휘 지로 쓰고 돌아갔으며, 아버지가 榜(합격자 명단)의 상황을 물으니 합격한 200인의 성명, 주소등을 빠 짐없이 암송하여 가히 신동이라고 일렸다.
1621년이던 24세시에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었다가 인조반정후 정자·정언· 교리를 지냈다. 1626년(인조 4년)에 다시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재하여 헌납·응교를 거쳐 승지에 올랐다.
그러나 1632년 인조의 사친추종을 반대하여 충원현감에 좌천되자 사직하였다가 다시 등용되어 병 조참지·예조참의·진주목사를 역임했다.
1643년(인조 21년)에 왕세자가 중국 심양에 볼모로 잡혀 갔 을 때 우부빈객으로 호종하였다가 돌아와서 승지를 거쳐 형조참판겸 비변사 당상에 이르렀다.
어려서부터 신동이라 불리우고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나 아버지와 형 명한과 함께 송나라의 삼소(詢·軾·轍 즉 소동파 형제와 그 아버지)와 비교되었으며 인조 23년이던 서기 1645년 향년 45세를 일기로 조졸하였다.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고, 저서로는 현주집이 있다. 묘는 하면 현리 안곡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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