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재질이 뛰어나 신동이라 하였는데 그는 당대의 대학자였던 정홍명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면서 부터 그 그릇됨이 날로 크게 진취되니 조부였던 월사마저 나라에 쓰여질 큰 그릇이 되겠다고 칭찬한 바도 있다.
1628년(인조 6) 17세에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나이가 연소하여 벼슬길에는 나가지 않고 있다가 22세되던 해에 說書가 되면서부터 사관의 길로 들어가 검열(檢閱)을 거쳤으며, 1636년 사간원 정언으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척화를 반대하다가 죄인의 누명을 입어 서해안 어느 외딴섬으로 유배되는 불운도 겪었다.
그러나 그후 효종임금이 즉위하자 이내 풀려나 복직되어 요직을 두루 거치고 1654년(효종 5)에 진하부사로 중국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해에 돌아왔는데 그는 이때 청나라에 대한 실 정을 자세히 보고하여 효종으로 하여금 북벌계획을 수립토록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1657년 부제학이 되어 선조실록의 수정 편찬작업에 참여하고, 이어 홍문관·예문관의 대제학이 되었 다.
1659년 효종이 승하하여 빈전도감에 차출되어 영릉지상의 애책문을 짓기도 하였다.
1660년 현종이 임금에 오른뒤부터 이조와 예조의 참판 그리고 대제학이 되었으며, 그후 우참찬·한 성부 판윤·동지경련사·지의금부사·춘추관사·호조판서등 주요 요직을 거치다가 예조판서로 있을 때 향년 55세에 이르러 별세한 관계로 영상에 이르지 못했다.
천성이 너무도 강직하여 항상 주위의 시기도 많이 받았으나 당시의 대현(大賢)이던 우암 송시열과는 지기가 상통하여 자주 시화(詩話)로 정담을 즐 겼다고 한다.묘는 하면 현리 안곡에 있는데 좌의정 박세채가 짓고, 우참찬 조상우가 쓰고, 예문관 제학으로 있 던 김창협이 전서를 써서 기록한 신도비가 연안이씨비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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