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몸이 쇠약하여 질병이 있었으나 자라면서 서서히 쾌유되었으며, 학문을 즐겨하여 소학·가례등 여러 서적들을 두루 통달하였다.
인조 기묘년에 초시(初試)에 응시하여 생원이 되고 현종대왕의 명에 의한 특별시에서 장원하였다.그러나 그의 선대 태학공이 시관당직이라는 이유로 이듬해 재시에 응하여 또 장원하고, 1666년(현종 7) 식년시에서 갑과 제일인망이라는 괴장원이 되니 이는 조선조 과거역사에 처음 있는 연삼장원(連三壯元) 이었다.
처음에는 전적·중학교수로 있다가 성권찰방(成歡察訪)으로 나갔으나 병을 얻어 돌아왔다가 다시 전적·수조정랑겸기주관·해운판관·지평등을 역임하였다.
1670년(현종 11) 전주판관에 승진하였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다시 전나도사로 제수되었지만 병을 이유로 부임하지 않고 있다가 1672년 1월 6일 향년 56세에 별세하였다.후에 자헌대부 이조판서로 증직 되고 묘는 가평군 설악면 송산리에 있으며, 고성군수를 지낸 이식이 지은 신도비가 길가에 서서 옛 선 인의 자취를 빛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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