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즐겨하여 조숙한 편이었고, 1648년(인조 26) 진사시에서 장원하고, 이듬해에는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가 說書·대교·봉교·부수찬·교리등을 거쳐 이조·병조의 정랑을 지내고 1655년(효종 6) 이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후에 대간(臺諫)을 거쳐 청풍부사가 되고 1658년에 응교가 되었다가 다시 인천부사로 나갔으나 이 내 사퇴하고 양주에서 학문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1644년(현종 5) 사헌부 집의가 되고 1669년 부제학으로 서련관을 겸했다.
그는 후생교육에 힘을 기우려 문하에 당대 대학자로 이름 높았던 김창협·김창흡·임영·아들인 이희조등을 배출하였다.
1669년 41세에 요절하니 그를 아는 선비들이 각처에서 치제했다고 하며, 조정에서는 시호를 문정(文貞)이라 내렸다. 묘는 용인 모현면 동림리에 있다.
숭정대부 좌찬성에 추증하였다. 그가 쓴 유고는 지금도 전해온다. 묘는 가평군 상면 태봉리에 부인 진천송씨와 함께 있다.
[문화체육과 문화예술팀 031)580-20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