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정 이천보 등록일 : 2010-07-13작성자 : 관리자

이천보(李天)輔의 자는 의숙(宜叔)이요, 호는 진암이며, 본관은 연안으로 1698년 (숙종 25년 무인)에 이주신의 아들로 태어났다.어려서부터 용모가 뛰어나고, 풍채가 의연해 보였으며,총명했다고 하나 그는 큰 뜻만을 품은 채 글읽기를 싫어했고, 동네 아이들과 같이 소(牛)를 타고놀기를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진암은 나이 들면서부터 책을 가까이 했고, 그 결과 생원시험에 합격하여 내시를 가르치는 내시교관(內恃敎官)이 되면서부터 학문에 몰두하여 여러번이나 문과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 다가 42세되던해(영조16年 기미 서기 1739년)에 비로서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정자,교리,헌납,장령등의 벼슬을 거치다가 1749년(영조 25년)에 이조참판에 올랐다.

그후 이조와 병조판서를 거쳐 1752년에는 우 의정에 이어 좌의정이 되었다가 1754년(영조 30년)에 일팔지하만인지상의 영의정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조정에서는 노론이니 소론이니 하여 사색당쟁이 판을 치던 시기였고, 노론인 김상로와 홍계회등이 자신들을 미워하는 세자(世子:장차 임금이 될 동궁)의 의중을 알게 되면서 부터 온갖 음모 를 꾸며내기 시작하였고 급기야는 세자가 영조의 총애를 받고 있는 시녀 문씨와 화애옹주가 거처하고 있는 서궁으로 자주들리도록 만들어 놓고, 영조의 분노를 사도록 계략을 꾸민 결과 대궐안이 온통 영조 와 세자를 둘러싸고 모함과 이간질로 가득 쌓였을 때인지라 진암 이천보도 이러한 와중에서 영의정의 자리를 떠나 판중추부사 그리고 영론령부사 또다시 영의정이 되는등 파란 곡절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장헌세자의 평양원유(平壤遠遊) 사건이 일어났고, 진암은 영의정에 있으면서도 이를 수습치 못해 끝내 극약을 먹고 자결하고 말았다.솔직 담백하면서도 부귀영화에 눈을 돌리지 않았던 관계로 임금앞에서도 直諫(직간)함을 자주하여 어전에서 여러번이나 관직을 박탈 당했지만 그때마다 불과 몇일만에 복직되기도 하였다. 검은 소를 자주 타고 다녔다하여 까막소 대감이란 별명도 얻었고, 반계동계곡에서 삿갓을 쓰고 낚시질을 하며 세월을 탄식하던 진암의 모습에서 청빈한선비의 정신을 느끼게도 한다.

이천보의 무덤은 본시 경기도 부천에 있었으나 1975년 진암이 태어난 생가가 있는 가평군 상면 태봉리 반계동으로 이장한 것이다.
[문화체육과 문화예술팀 031)580-2063]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