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5년(영조 11)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가 충주목사로 승진하였으 며, 1753년(영조 9)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통정대부가 되고 1760년 가선대부를 시작으로 가의·자헌·숭 록대부가 되어 판결사·도승지·대사헌·판윤·예조병조판서·금오장· 춘추관총관·수어사·판의금부사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기두에 들어가 인양군에 습봉(襲封)되었다.
그는 문장이 빠르고 유창하였고 옛 고사에도 통달했으며 특히 대인관계가 매우 공손하고 정성스러 워 사람의 귀천을 차별하지 않았다. 집무를 보다 퇴근하면 반드시 숙연히 앉아 하루를 돌아보며 내일 일을 구상했다고 한다.
또한 손수 꽃을 심고 길러 스스로 즐기고 있으면서도 의복은 매우 검소해서 평 민과 다름이 없었다.그가 한성부 우윤으로 였던 1760년(영조 36) 영조대왕이 재상들 앞에서 이르기를"이경호는 사람됨 이 지성스럽고 소박하며, 서무에도 매우 밝은 사람이다." 하여 우윤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는 임금의 은총을 무상의 영광으로 여기어 자신의 집무실을 무화라 이름짓고 현판까지 걸었었다는 고사도 있다.
1779년(정조 3) 7월 3일 75세에 별세하였고, 묘는 가평읍 대곡리 자좌에 배위 정경부인 연일정씨와 합부(合 )로 있다. 묘비는 아들 재협이 짓고, 임파현령을 지낸 조윤형이 썼는데 이 비석은 중국에서 특별히 주문해온 것으로 돌이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운게 특징인 옥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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