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를 그린 오경석등록일 : 2010-07-13작성자 : 관리자

오경석(吳慶錫)의 자는 원거(元 )요, 호는 역매(亦梅) 또는 진재(鎭齋)이며 본관은 해주로서 1831년 지충주부사를 지내던 오응현의 아들로 태어났다. 팔대동안이나 통역관(譯官이라 부름)을 지내온 관계로 역관대감댁이라 불렸으며, 오경석 또한 대를 이어 역관이 되었다.

18세 되던 해(1853년)에 역관으로 중국에 건너 갔다가 중국 신문화의 개혁사상가가된 장지동·주수 창·오대징등을 북경의 어느 서점가에서 만나 알게되어 깊은 교류를 갖게 되면서부터 개화사상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그는 중국에서 구입한 해국도지·영환지략등의 서책을 갖고, 귀국하여 친구이자 의관이던 유대치에 게 보여주고, 현실의 역사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양반 청년들에게 개화사상을 보급하여 개혁주체 세력을 형성하는 길밖에 없다는데 뜻을 같이하고, 이들을 교육시키고자 하였으나 중인이란 신분의 한계 때문에 은밀한 방법으로 개화사상을 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1869년 사절단의 일원으로 북경을 방문하고 돌아온 박규수가 평안도관찰사에서 한성부판윤으로 자리를 옮기면서부터 이들의 개화운동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박규수의 주선으로 재동 사랑방에 김옥균·박영효·박영교·서광범·유길준·김홍집등 소위 양반청 년들을 불러모아 이들에게 신서를 읽도록 하고, 신사조의 이야기를 오경석·박규수를 통해 들으면서부 터 개화사상의 눈을 떴고, 이들의 세력은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발전하여 개화당이 되었던 것은 너무도 유명한 개화사상의 시발이었던 것이다.

1869년(고종 6)에 통정대부가 된 후 가선대부·자헌대부를 거 치고, 1876년 한학당상역관으로 있으면서 좌의정 박규수와 더불어 개국을 주장하여 병자수호조약의 체 결을 지지함으로써 이 조약을 원활히 맺게 하였다.

1877년 승정대부를 거쳐 숭록대부가 되면서부터 쇄국정책에 반대하고, 문호의 개방과 선진문명의 수입을 주장하는등 명실공히 개화사상의 선봉이 되었다.

당시 오경석이 저술한 양요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적혀 있다."1866년 프랑스 함대가 우리나라 인천부근으로 쳐들어오던 병인양요 사건당시 오경석은 대원군의 지시로 북경에서 이 프랑스 함대에 관한 기밀정보를 빼내고, 그 방어대책을 마련하는 등 외교활동을 벌 렸는데, 대원군은 이 전투에서 프랑스 함대를 격파하고 기세를 올렸다." 이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보 아 오경석의 외교수완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고, 또 그의 덕분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대원군의 쇄국정치를 반대함으로 인해 그후 대원군의 위협을 받았다.

오경석은 일찌기 병자수호조약 당시 太極旗(태극기)를 제일 먼저 그려 일장기와 나란히 걸어놓고 조약을 체결한 장본인이니 우리나라 태극기 제작의 효시였음이 분명하다. 그는 금석학에 대한 관심도 커서 중국의 금석문을 수집해 들였고, 그림과 글씨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특히 전서를 잘썼다고 전한 다.

그의 아들 오세창은 삼일독입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중의 한사람 이었으니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 는 애국자의 집안임을 잘 대변해 주며, 그의 묘는 가평군 설악면 회곡리 밤가시골에 있다.
[문화체육과 문화예술팀 031)580-2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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