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지사 장호리 등록일 : 2010-07-13작성자 : 관리자

장호리(張浩利)의 본관은 단양(丹陽)이고, 시조 장진필(충헌공)의 34세손으로서 1895년 7월 12일 장한석의 세째 아들로 북면 목동리에서 태어났다.어려서부터 예절이 밝고 총명하였으며 매사에 의리가 깊었고 또한 학문을 즐겨하였다.

소년시절 목동리 멱골에 있던 이규봉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고 접장(훈장)이 되어 후생도 가르쳤다.

23세 되던 1919년 서울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음을 훈장으로부터 전해듣고 가평에서도 봉기하 기로 결심하고, 형님이던 호형과 밀의하여 비밀리에 태극기 100여매를 제작하였으며, 그해 3월 15일에 는 주민들과 더불어 북면 면사무소 앞에 나아가 독립만세를 불렸으며 가평읍내 군청앞까지 이르러 수천 의 군중들과 더불어 독립만세운동에 선봉역을 맡았다.

그러나 그는 그날밤 왜경에 붙잡혀 구속된 후 고 등법원으로부터 징역 1년의 선고를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모진 고통의 옥고를 겪고 풀려났다.

그는 일제의 식민지 기간을 요주의 인물로 낙인되어 매양 감시를 받고 농업에만 종사하니 가업이 극진히 어려웠다고 전한다.

그러나 1983년 8월 31일 이 사실이 정부로부터 인정되어 독립만세 애국지 사로 대통령 표창을 추서 받았으며 묘는 목동리 묘골 능선에 있고, 묘비도 세웠다.


[문화체육과 문화예술팀 031)580-2063]
TOP